모차르트·베토벤·클림트…빈은 600년간 '유럽 예술의 수도'였다

입력 2022-10-13 17:28   수정 2022-11-11 00:01


오스트리아 빈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쇤부른 궁과 호프부르크 궁이 있고,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 빈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최고 집산지’ 빈 미술사 박물관이 있다. 음악의 수도라는 별명답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가 살았던 집들이 기념관으로 변모해 남아 있다. 벨베데레·레오폴트 미술관에는 ‘키스’를 비롯한 클림트와 실레의 걸작들이 가득하다.

빈을 잘 모르는 방문객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조그만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이렇게나 화려하단 말인가. 빈의 화려한 면면은 하나의 단어를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바로크 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도시, 빈의 위용은 바로 ‘합스부르크’라는 한 가문에서 비롯됐다.

1273년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했다. 스위스의 평범한 백작 집안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손이 신성 로마 제국(962~1806)의 황제로 선출된 것이다. 황제 선거권이 있던 일곱 선제후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고, 대립 끝에 별다른 배후 세력이 없었던 루돌프 합스부르크를 황제로 선택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기틀은 아직 미약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은 교황청과 독일어권 제후들 사이의 세력 판도에 따라 여기저기로 오갔다.

혼란의 와중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4세(1358~1365 재위)가 1359년, 자신이 일곱 선제후 위에 존재하는 ‘대공’이라는 거짓 문서를 들고 나타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허위 문서를 근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세습할 자격을 얻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결혼을 통해 플랑드르(벨기에·네덜란드) 스페인 헝가리를 차례로 합병했다. 마침내 1500년대 중반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북이탈리아 보헤미아 플랑드르 스페인을 모두 통치하는 유럽 최고 왕가로 부상했다.


합스부르크는 1440년 이후 빈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아 왔다. 빈은 자연히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됐다. 황제의 수도이자 군사적인 요충지며 인접한 이슬람 국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에서 기독교 세계를 지켜야 하는 최전방이었다. 빈의 문화는 화려한 동시에 묘하게 보수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이런 분위기의 빈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빈 고전주의 음악가들이 활동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 영토 안에는 11개의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언어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장려했고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황제의 궁정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빈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도 있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1782년 빈으로 왔지만 소원하던 궁정 악장 자리를 끝내 얻지 못하고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반면 1792년 빈에 정착한 고전주의 음악의 최고봉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귀족들의 후원과 악보 출판으로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며 끝까지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아남았다.
클림트의 등장, 제국의 몰락
1850년대 이후에는 매일 저녁마다 빈 시내 곳곳에서 왈츠 무도회가 열렸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의 왈츠곡들은 발표하는 족족 큰 인기를 얻었다. 빈은 외부의 모든 변화를 굳건하게 외면하며 과거로 돌아가기를 꿈꿨다. 물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빈은 1808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는 큰 굴욕을 겪었다. 이때 빈 구도심을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사실상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1848~1916 재위)는 성벽 자리에 도심을 원형으로 감싸는 환상 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새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계획의 중점은 환상 도로 주변에 장대한 바로크식 건물들을 대거 세워서 황제정의 위엄을 만방에 과시하는 데 있었다.

유럽 도시들이 도로를 넓히고 하수도와 도서관을 만들며 시민을 위한 도시를 한창 건설하고 있을 때 빈은 때아닌 바로크 시대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시청사, 오페라 하우스, 미술사와 자연사 박물관, 빈 대학 본부, 부르크 극장 등등 도로를 둘러싼 웅장한 건물들이 1870~1890년대 줄줄이 완공됐다.


빈의 해묵은 역사 지향적 분위기에 진보적인 빈 시민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거대 박물관 같은 링슈트라세를 비판하면서 빈에도 새로운 예술의 분위기가 싹을 틔웠다. 1897년, 빈의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예술에서 자신을 분리하겠다는 의미의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연맹의 회장으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를 추대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과 제국의 위상은 20세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190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즉위 60주년을 맞았다. 제국의 영토는 더 넓어졌으며 황제의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황제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대규모 미술 전시회 ‘쿤스트쇼’에 출품된 클림트의 작품 중 하나가 ‘키스’다. 한때 정면으로 제국의 보수주의에 저항하던 클림트는 타협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고답적이고 정교한 황금빛 장식 속에 싸여 있는 연인들의 모습은 오래된 도시 빈에 보내는 클림트의 항복 선언과도 같았다.

영원할 듯하던 제국은 눈 깜짝할 사이 파국에 맞닥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됐다. 한 달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당사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는 물론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 전 유럽이 삽시간에 어둡고 긴 전쟁의 터널로 빨려들어갔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됐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들은 국외로 추방됐고 오스트리아는 제국 영토의 80%를 잃었다. 제국의 종말과 함께 빈에서 명멸하던 예술가들의 집단도 흩어졌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 분리파의 두 기수는 1918년 종전과 함께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이들이 살았던 ‘어제의 세계’ 빈에는 이제 황제도 제국의 영광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링슈트라세의 양편을 메운 장대한 건물들과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들, 그리고 클림트와 실레의 번뜩이는 영감을 담은 작품들은 여전히 빈에 남아서 한때 화려했던 이 도시의 과거를 추억하게 해주고 있다.

전원경(예술 전문 작가, 세종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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